“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1년 중 364일 동안 관리와 감시의 대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우리들이 이날 하루만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 뿐입니다. 에이즈에 걸린 것이 무슨 기념할 일인가요. 사회의 낙인과 차별 속에서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그날 하루 위로 잔치를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음달 1일은 ‘세계에이즈의 날’이다. 1988년 세계보건장관회의에 참가한 148개국이 에이즈 예방을 위한 정보교류와 교육, 인권존중을 강조한 ‘런던선던’을 채택하면서 제정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감염인들은 2006년부터 이날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로 선포했다. “감염인들을 시한폭탄과도 같은 감시대상으로 간주, 차별과 인권침해를 확산시켜온 한국 정부가 세계에이즈의 날을 기념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에서 비롯됐다. 에이즈 퇴치나 예방의 날이 아닌 감염인의 인권의 날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27일 HIV/AIDS 감염인 치료접근권 확보 및 인권주간 선포를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만난 윤 가브리엘(36·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씨는 목도리를 쓰고 털장갑을 끼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쌀쌀해진 날씨를 탓하면서도 “1년 365일 에이즈 감염인들은 춥게 살고 있다”며 현재 감염인들이 처한 현실을 비유했다. 그는 8년째 에이즈로 투병 중이다.

“이 땅에 에이즈가 발견된 지 23년이 됐습니다. 첫 번째 환자가 발견된 1985년부터 지금까지 사회는 많은 변화를 거쳐 왔죠. 하지만 에이즈 환자들이 사는 세상은 변한 게 없습니다. 1985년에는 에이즈를 치료할 약이 없어서 환자들이 죽었다면, 2008년에는 내성이 생긴 환자들이 신약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이 ‘HIV/AIDS 감염인의 건강권이 없는 한 세계에이즈의 날은 없다’라는 주제로 마련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건강권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HIV감염인의 현실을 정부가 외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국적제약사 로슈의 푸제온은 기존의 에이즈 약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에게 절실한 치료제로, 2004년 11월 한 병당 2만4996원(연간 1800만원)으로 보험적용이 됐다. 그러나 푸제온의 시판허가를 받은 한국로슈가 약값 인상을 요구, 연간 2200만원을 주장하고 있어 현재 국내에서는 유통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한국로슈에 대해 “약을 먹고 건강할 ‘권리’를 ‘자격’으로 둔갑시켰다”고 비판했다. 또 보건복지가족부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에이즈 치료비를 후불제로 전액 지원하지만 실제 치료비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다 지원마저도 지연돼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며 푸제온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 발동을 촉구했다.

윤 가브리엘씨는 “에이즈를 ‘죽음의 병’ ‘공포의 병’으로만 인식하고, 정부가 감시와 관리 체계로 환자들을 낙인과 차별을 조장하는 현실에서 감염인들의 삶은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이어 “더 이상 차별받는 현실을 눈으로 보고만 있지 않겠다. 인권을 보장하고 차별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더 크게 외칠 것”이라며 “인권 없는 ‘에이즈의 날’ 필요 없다. 감염인 인권을 보장하라”고 호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은 “에이즈 감염인은 꽃보다 아름답다. 함부로 꺾지도 짓밟지도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편 이들은 28일 ‘HIV/AIDS감염인의 노동권 확보를 위한 ILO기준마련과 국내 쟁점’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29일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AIDS, 편견을 묻다’는 캠페인을 열 계획이다. 또 ‘세계에이즈의 날’인 다음달 1일에는 ‘세상의 편견을 깨우는 소리들, 모두 모여라’는 거리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